18세기 유럽 전장에서 머스킷 사격의 이상과 현실 역사의 문을 두드리며

  다음 문단은 크리스토퍼 더피(Christoper Duffy)가 저술한 "The Military Experience in the Age of Reason"(Routledge, 1987)에서 211쪽 ~214쪽을 거칠게 번역한 것이다. 본서는 18세기 유럽에서 장교와 병사의 선발과 훈련, 그리고 전장에서의 각 병과(보병, 기병, 포병)의 운용의 실태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다. 이 중에서 글 제목에서도 적혀있듯이 머스킷 사격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대목이 눈길을 끌어 번역해보게 되었다. 프랑스나 프러시아 쪽 인명이나 기타 고유명사의 경우 확실한 표기법을 몰라 한글로 따로 표기하지 않은 점은 양해바란다.

"좁은 간격으로 배열된 당대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것으로 보이며, 머스킷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행위와 머스킷의 굉음에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병사들한테 총알이 정확한 곳에 맞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 몇차례의 일제사격을 실시한 이후 병사들은 일반적인 사격 절차를 무시하였다. 꽂을대는 화약이나 총알을 제대로 장전하지도 않은 채 들락날락거렸으며, 어떤 때에는 꽂을대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개머리판을 땅에 두들겨서 화약이나 총알을 총열로 내려보내는 방법을 선호하였다.

이상적인 상황에서의 발사 속도는 실제로 병사들이 60개의 탄약대와 식량, 야영 물품 일부분을 등에 인 상태에서 보일 수 있는 발사 속도를 추측하는데 오해를 불러왔다.

'병사들은 자신의 몸에 모든 것을 짊어진 채 전쟁터에 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은 1분에 몇 발이나 총을 쏠 수 있겠는가? 분당 최소 5발? 이는 훈련장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발사 속도이고, 이는 적을 수천 명 죽일 수 있다는 환상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병사들이 인 짐의 무게를 생각할 때, 그리고 특히나 훈련장에서 병사들은 평시 야영지에서 이는 짐의 무게를 넘어서 완전 군장을 짊어진 채 사격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실전에서 병사들이 분당 1발, 록은 2발은 사격한다고 보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Cogniazzo 의 저서, 1779년, 147쪽)

발사 속도가 이처럼 낮다고 해도 총열은 20발, 혹은 30발만 쏴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과열되었고 화력전이 지속될 때 총열 내부는 탄소를 더러워져 장전을 하는데 긴 시간과 적잖은 노력이 필요하였다. 불발, 오발의 사례는 매우 많았고 이는 병사들로 하여금 총열이 폭발하여 피해를 입거나 총이 무용지물이 되어 적에게 방어수단이 없게 노출되는 상황에 처하게했다. 이른 아침이나 습기찬 날씨에 가장 흔한 불발, 오발 원인으로는 습기가 격발 장치에 스며들어가는 것이었다. 쿨로든 전투(1746년) 이후 한 영국군 병사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자코바이트 병사들은 그날 날씨가 너무 안좋아서 우리들이 머스킷을 쏠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난 우리는 머스킷을 외투로 감싸 마른 상태로 유지했기 때문에 불발한 머스킷이 연대 당 하나 꼴이었다는 점을 간과했습니다.'
(Linn 의 저서, 1921년,1장 24쪽)

머스킷으로 몇 발을 사격한 후(이는 부싯돌의 질에 따라 달랐다.) 부싯돌은 무뎌져서 점화구에 담긴 점화약을 점화하는데 실패하였고 이는 병사들로 하여금 부품을 교체하는데 신경쓰게 하였다. 점화구는 자주 더러워졌으며, 이는 점화구에 담긴 점화약이 총열 안에 장전된 화약과 이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발화만 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흥분과 굉음으로 가득한 전장에서 병사들이머스킷의 불발을 즉각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으며, 이 때 병사들은 탄약을 계속 장전하여 5발, 6발 이상을 겹쳐서 장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첫번째로 장전한 탄약이 발사되었다면 총열은 폭약통처럼 폭발하였다. 또한 총구가 눈이나 흙으로 막히거나 총알이 총구에 막혔을 때, 혹은 꽂을대가 장전 이후에도 총열 속에 있을 때에도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꽂을대는 너도밤나무나 다른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황동으로 끝을 씌웠다. 이 연약한 막대기는 장전하는 과정에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자주 부려졌으며 1698년 초 프러시아에서 Anhalt-Dessau 연대에 처음 철제 꽂을대를 지급한 이후로 명확한 전술적 이점을 얻게 되었다. 영국과 기타 국가는 18세기를 거치면서 철제 꽂을대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헐리 대령을 철제 꽂을대 또한 나름의 단점을 가졌다면서 불평하였다.

'보병들이 접하는 철제 꽂을대는 매우 우스꽝스럽다. (중략) 만약 꽂을대가 철과 다른 금속의 합금으로 제작되지 않는다면 구부러져서 원상복구를 할 수 없다. 강철의 비중이 높다면 유리처럼 부러지며 습기찬 라씨나 안개가 자욱한 상황에서 녹이 슬어 뺄 수가 없으며 항상 그렇듯이 천막 아래에서는 이슬에 젖어 녹이 슨다.'(헐리 대령(1726년), 1946년 저서, 93쪽)

따라서 첫번째로 쏘는 총알은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첫번째 총알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여유있게 무기가 깔끔한 상태에서 날이 선 부싯돌로 장전했기 때문이다. 근거리에서 이러한 총을을 일제사격으로 발사하였을 떄 높은 살상력을 보였다. 요컨데 폰테노이 전투(1745년) 당시 일제사격으로 19명의 장교와 600명의 프랑스 군인과 스위스 근위대가 몰살당하였다. 퀸시(Quincy)는 이 점에 대해서 확고한 입장을 품었다.

'우리는 반드시 그 무엇보다도 병사들이 사격을 자제하고 적의 사격을 견딜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일반적인 상왕에서 대대가 이미 사격을 했다면 진 것이나 다름 없고 적은 화력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퀸시, 1726년, 8장 67쪽) 그러나 그와 같은 모국을 지닌 한 명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적의 사격을 몇차례 맞은 대대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상황에서 사격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대대가 적의 돌격을 받아들이거나 전력이 언존한 적에게 돌격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행위를 상상하거나 전쟁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장교들에게 원장할 수 있겠는가?(Bigot, 1761년, 1장 260쪽)

보통 이 문제는 일단 보병이 사격을 개시함으로서 해결되었다. 병사들이 매우 잘 훈련되고 기운이 넘친다면 사격은 대대나 소대의 장교들의 지휘하에 거의 자동적인 과정을 거쳐 시작되었다. 프랑스 외교관 valori 는 실레시아 전쟁 당시 프러시아 군과 동행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몰로비츠에서 그들은 800걸음(역자 - 저서에 따라 한 걸음, 곧 pace 를 60센티미터 혹은 75센티미터로 본다), 혹은 심지어 1,000걸음에서 사격을 개시하였다. Hohenfriedburg 에서 좌익의 일부분은 적이 전혀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 것이 시발점이 되어 우익과 중앙의 소대들이 사격을 시작하였으며 나머지도 기계적으로 사격하였는데, 항상 엄격히 소대의 순서대로 사격하였다.'(Valori(1748년), 1894년 저서, 308쪽)

몰로비츠에서 프러시아 보병대는 그들이 훈련장에서 배운 것 이외 다른 상황으로 전투가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총알 세례를 버티고 나아갔고 마침내 사격을 개시할 때에는 '1열은 규정대로 무릎을 꿇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대열이 흐트러질 것 같으면 장교들은 병사들로 하여금 머스킷을 어깨로 거두게 하였다.'(Archenholtz, 1974년 저서, 22-3 ; Bernhorst, 1845년 7월, I, 70-1)

프라하 전투(1757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은 꾸준한 일제사격을 유지하였다. 엄격한 사격 통제는 Breslau 전투(1757년) 당시 클라인부르크 마을에서 Lestwitz 출신 프러시아 연대 또한 유지하였다.

Lestwitz 연대는 그보다 7개월 이전에 프라하에서 극심한 전투를 경험하였으나, 그 이외 다른 사례들은 평시의 집중적인 훈련 이후 전투를 첫 경험한 부대들이라는 것이 주목할 만 하다. 모든 신뢰할 만한 자료들은 후대의 전투에서 꾸준한 일제사격, 특히 사단, 소대, 열에 따른 복잡한 사격 절차는 화력전이 개시된 이후 금방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Fermor 의 1736년 '배치', Baiov, 1906년, 55-6 ; Darlymple, 1761, 51 ; Saint-Germain, 1779, 225 ; Wissel, 1784, xxxix ; Toulongeon 과 Hullin(1786), 1881, 197, 355 ; Houlding, 1981, 354)

전투 상황에서 소대 사격은 장교들을 지나치게 많이 필요했으며 그들은 1열 앞에서 3걸음 가량 서서 좌측을 바라본 후 소대의 전방을 둘러봐야했다.

'때문에 모든 소대 장교들은 8인치, 10인치 간격으로 총알이 그의 가슴과 들을 스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중략) 소대의 병사들은 장교의 명령에 주의를 고도로 기울여야 하며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여 주변 다른 소대 장교들의 목소리와 헷갈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장교를 바라본다면 병사들의 시선을 총열을 벗어나게 되는데, 이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두번째 소대를 지휘하는 장교는 일곱번째 소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마찬가지로 첫번째 소대의 장교는
여덟번째 소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소대의 사격 순서를 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총을 쏴서 생기는 연기가 소대 사이를 매운다면 장교의 시야는 가로막힌다.(Berenhorst, 1798-9, I, 226-7 ; bigot, 1761년, I, 273)

병사들은 고도로 흥분된 상태에 빠졌으며, 자칫하면 뒷 열에 쏜 병사들이 실수로 쏴서 머리가 터질 수 도 있었던 1열에 선 불운한 병사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본서 246쪽 참조) 때문에 1열의 병사가 장전한 후 무릎을 꿇고 사격한 후 1열의 병사들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Parma 와 Guastella 전투(1734년)에서 프항스와 오스트리아 보병 양측의  상당부분은 모두 무릎을 꿇었으며 '크로아티아 사람 처럼' 전장을 기어다니면서 사격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Guibert(1772), 1804, I, 102 ; Warnery, 1785~91, II, 210~11 ; Ligne, 1795~1811, XVIII, 70)

프러시아 인들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일제사격을 아주 잘해봐야 대대 단위에서나 조잡한 수준으로 몇차례, 그도 아니면 Gross-jagersdorf 전투(1757년)에서 처럼 보병 전열 전체의 대규모 일제 사격 정도만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다 압도적인 경우 기존의 사격 통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병사들은 '개별적 사격'을 개시하였다.(feu de billebaude, placker-feuer, Bataillenfeuer) 때문에 Dettingen 전투(1743년)에서 영국 보병에게서

'하이드 파크에서 배운 사격 통제 방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보병 3열이 모두 각자가 알아서 사격하였을 뿐이다. (중략) 온 판단력과 기술을 기울여 최대한 몸을 낮추어 모든 총알이 명중할 수 있게 사격하였다. (중략) 프랑스 군 또한 같은 방식으로 사격하였다. (중략)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이다. 스태어 경은 실제로 여러 차례 말하기를 자신은 많은 전투를 경험했지만 이 것 이외 다른 방식으로 보병이 교전하는 경우를 본 적이 전혀 없다고 말하였다.(Orr, 1972, 65 에서 인용. 비록 사격의 위력에 대해서는 과장이 섞여있을지라도 사격 과정 묘사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프러시아와 하노버의 장교들은 최소 지휘 단계에서조차도 사격을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당황하였다. 그러나 최소한 두 명의 프랑스 저자는 '개별적 사격'(feu de billebaude)을 현실로 인정하였으며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Chabot 장군은 개별적인 사격은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과녁을 선택하여 자기에게 걸맞는 속도로 사격을 하고 불발 상황을 알아서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한 1734년에 일어난 일련의 승전의 원인을 이러한 사격 방식에서 찾았다.(Chabot, 1756년, 5~20)

Guibert 는 '개별적 사격'은 가장 효과적인 사격방식이라고 보았고 이 사격 방식을 실행하는데에는 단 두가지 명령, 곧 사격을 언제 시작할 지와 언제 끝낼지만을 알리는 명령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왕실 Deux-Pont 연대가 Vellinghausen 전투(1761년)에서 이렇게 싸우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이 때 적당한 신호는 북소리로 표현하였다.(guibert(1772), 1804, I, 108)




전장에서 교리와 현실의 괴리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교대사격이나 일제사격과 같이 가장 기본적으로 보이는 사격통제조차도 엄수되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였다는 점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아마 읽으시면서 본문에도 나온 프러시아와 하노버 장교들처럼 당황하신 분들도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머스킷을 중심으로 한 18세기 유럽 전장에 대한 글을 아주 못 접한 것은 아니지만, 전장에서의 실태를 이렇게 세밀하게 알려주는 글은 저도 이 것이 처음이라서 감히 번역해보고자 하였습니다.

덧붙이자면, 본문에서의 핵심 개념은 소대 사격입니다.(Platoon Fire) 보통 머스킷 사격 방식으로는 열이 순차적으로 교대하는 방식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소대 방식은 17세기 후반 ~ 18세기에 유럽에서 널리 쓰인 새로운 사격 방법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기존의 열을 중심으로 한 사격 방식과는 달리 소대 사격에서 사격의 최소 단위는 소대인데, 좌우로 소대를 배열하여 소대가 순차적으로 사격하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첫 번째 소대는 마지막 소대가 사격하기 전에 또 다시 사격을 하는 등,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소대가 사격을 하면서 이른바 물결치듯이 연속적으로 사격을 하게 되는 방식입니다. 다만, 이 쪽으로는 저도 아직 자세히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더 깊이 설명드리기가 힘듭니다. 게임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다음 동영상을 보시면 열 단위의 교대사격과 소대 사격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 링크를 걸어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abf8x7-c4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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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크의 헉헉 2013/01/13 00:36 # 답글

    궁금한적이 있는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남북전쟁당시에도 18세기에 사용되던 라인배틀이 번번했다는데 이 경우에도 위와 같은 결과를 보여주나요?
  • 금린어 2013/01/13 00:45 # 답글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각국의 보병전열의 특징들에 대한 농담이 기억나네요 ㅎㅎ
  • 문제중년 2013/01/13 11:40 # 답글

    platoon fire 는 보통 소대라 하지만 그냥 중대 절반으로 나눠서
    우를 1소대, 좌를 2소대라 칭하고 이걸 다시 중대, 대대, 크게는
    연대 단위로 늘어놨다 보심 됩니다.

    그리고 그 대열 전체(중대 / 대대 / 연대 ...)의 1소대가 먼저 쏘고
    대열 잡고 장전하는 동안 2소대가 사격하고 장전, 장전 끝난 1소
    대가 다시 사격 하는 식으로 운용되죠.
    물론 이걸 파도타기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걸 꽤 써먹은 영국군이 파
    도타기를 즐겨한건 아닌듯 싶네요.

    여튼 이렇게 한 경우 2줄의 씬 레드 라인을 만들고 앞줄이 무릎을
    꿇는 것 대신에 뒷열이 앞열의 틈사이로 총을 밀어넣게 배치시켜
    가능한 발사속도를 올리려던 영국군이라면 이론적으로 지속적인
    사격을 해댈 수 있었죠.

    문제는 여러 이유로 인해 이 사격들의 대부분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서도.

    p.s:
    남북전쟁때도 비슷했다고 평가되죠.
    총은 더나아졌고 불발도 많이 줄었지만 그렇다고 사용한 탄약 대비
    효과가 아주 좋아진건 아니었으니.

    이에 대해 사격 기술의 측면 - 사실상 저 때 신병이 쏘는 훈련탄약은
    10발 가량 - 부터 거리에 따른 살상에 대한 부담감에 주목한 해설이
    나오기도 하죠.



  • 明智光秀 2013/01/13 17:07 # 답글

    후후후 재밌게 보았습니다.
  • 뷁하 2013/01/14 07:21 # 답글

    제목대로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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